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했다.
2004년 2월 3일
언제나 사랑이 깊어갈 때는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이야.
그 두려움을 넘어서야 비로소 두려움 없는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지....
상대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내가 상대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혹은 이 사랑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어떤 이유로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만큼...
이유 없는 두려움이 왈칵 밀려오기도 할 거야.
그땐 차라리 포기해 버리고 싶기도 해.
하지만, 사랑의 본질로 돌아가서,
그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해 보는 것뿐이라는 걸 알고,
두려움을 접고 사랑을 해보는 거야.
그래도, 또 두려워져.....
상대가 왠지 시큰둥 해지면 또 덜컥 겁이 나지,
경험해 본 적 없는 커다란 상실감을 접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그뿐인가, 수시로 긴장하고 두려운 생각들이
나와 상대방의 사이에서 팽팽하게 끈을 놓지 않고 있지....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긴장되는 거야.
근데 그게 사랑의 묘미라고나 할까? 우스운 건, 너무 평탄해도 두려운 게 사랑이라는 거야.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 서로를 잘 느끼지 못하는 느낌은 또 다른 상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니까...
하여간 이런저런 두려움들을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하고 있음을 진하게 느끼기 시작하지...
그때가 진정한 사랑의 시작이야.
그러고 나면 두려움이 없다고????
그건 아니지.....
단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조금 아주 조금 성장한 것뿐이야.
두려움은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해.
사랑이 커지는 만큼....
그만큼 커지는 게 두려움이고 그래서 사랑은 아프고 가슴 시릴수록 깊어지는 거야.
사랑의 증상은 대체로 이렇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글쎄.... 누군들 사랑은 이것이다 라고 정의 내릴 수 있겠어?
그 신비롭고 애매한 감정을....
---- <사랑에 대하여> 중에서 ---- 시인 정유찬
p.s 한없이 무한한 사랑 앞에 아픔을 느낀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표현임을
그래서 감사한다.
나에게 가장 좋은 거 주심을 확신하기에
2016년 2월 4일 맑음. 햇살 강함. 바람 엄청.
아이를 데리러 학교를 가는 길.
바람이 엄청 나, 정신이 없다.
오늘 기온은 걷기 적당한 추움. 햇살 따뜻함이었는데,완전 속음.
작은 녀석을 데리고 걸어 가려니, 엄마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얼음 피하기 게임, 잔디만 밟고 게임으로 아이의 시선을 분산한다.
오는 길...
짧은 해가 지고 있다.
해는 저만치 기울어 가고, 바람은 여전히 미친 듯 분다.
내 머리칼도, 먼지 같은 눈물도 흩날린다.
바람이 분다.
난 왜 사랑이 늘 힘들었을까?
오래전 일기를 읽다 보면,
내 사랑엔 즐거움이 없다.
설렘도 없다.
그저 아프다.
젊은 날에 사랑으로 치부되기엔,
여전히 슬프게 느껴질 만큼, 우울한 추억.
그 기억으로 긴 시간을 상처받았고,
과한 자존감과 결여된 자신감 사이에 힘들었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랑'이란,
내 자신을 사랑하고 내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세상의 전부에 '그 사람'이 있다.
이런 인식 속에서 건전한 사랑은 피어난다. 이러한 관계는 양자가 평등하다.
서로 존중해 주고 배려하기에 관용이란 가치가 자리매김하며
서로가 생산적이면서도 능동적이 된다.
나 자신을 올바르게 믿는 것은 사랑이다.
타인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는 것은 왜곡된 것이다.
타인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 또한 그렇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중.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추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사랑을 간직했겠지.
누군가 성숙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말해주고 싶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만나라고,
그리고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내 마음이 먼저 건강해야 한다고...